은유(작가, 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브런치 카페에서 접시를 들고 친구랑 줄을 서 있었다. 먹을 생각에 싱글벙글 들떠서는 6가지 메뉴를 훑었다. 이중 3가지를 고르면 점원이 음식을 덜어주는 시스템이다. 내가 먼저 음식을 담아 자리에 앉았고 잠시 후 친구가 와서는 말한다. 점원이 묻더란다.

저 분 은유작가님 맞으시죠?

가슴이 철렁. 재빨리 좀 전의 행동을 복기해보았다. 내가 뭘 했지. 현실 아줌마인 나는 음식 받을 때 ‘많이 주세요’ 그런 말을 실없이 하곤 했는데 오십 세를 앞두고 자중하기로 했고 진짜로 안 했으니 잘했다 싶었다. 점원의 인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눈 앞에 있는데 사람의 눈을 보지 않고 음식에만 꽂혀 시선을 아래로 고정했다. 상대의 눈을 보는 일은 존중의 짧은 의례이거늘.

며칠 전 카드센터 일이 떠오른다. 다음 일정이 촉박해서 할까말까 하다가 15분이 소요된다기에 카드 교체를 신청했는데 시간이 두 배 걸렸다. 5분이면 됩니다, 소리를 3번 할 정도로 일이 야금야금 지연됐다. 계속 손목시계를 보던 나는 급기야 말했다. “처음부터 정확히 말씀해 주셨으면 지금 안 했을 거 아니에요.” 나의 정색 발언은 맞는 말이지만 적합한 말은 아니었다.

일이란 본디 여러 관계와 사정이 얽혀 있어 자기 통제와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삶도 그렇다. 이럴 줄 알고 했는데 저렇게 되버린다.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으면 당신이랑 결혼 안 했고,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애를 안 낳았고, 애초에 이런 일인줄 알았으면 이 회사에 안 왔고, 글 쓰는 일이 해도해도 숙련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아예 시작을 안 했을 거고, 이런 게 삶이라면 안 태어났고….

 

그럼 이제 와서 어쩌지. 이 집요한 삶의 배반을 견딜 방법은 없는가, 중국의 작가 이윤 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삶은 그저 삶일 뿐이지요. 늘 고난이 있습니다. 좋은 순간도 나쁜 순간도 있고, 저는 좋든 나쁘든 그 모든 순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어쨌든 우리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할 테니까요. 그것은 삶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친절은 우리가 베풀거나 베풀지 않겠다고 선택할 수 있어요. 타인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친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자신에 대한 친절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결국 친절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선택이기 때문에 저는 친절에 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친절은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희망적이다. 게다가 친절은 글쓰기로 훈련할 수 있다. 나는 삶의 고난이 자아내는 난폭한 일들로부터 ‘내 감정과 생활’을 보호하느라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글을 자꾸 쓰다보니 ‘남의 입장과 감정’도 보이게 됐고, 그 남을 존중하기 위해서 내 할 일을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카드센터 직원이 일부러 늦게 처리한 것도 아니니까 너그러이 이해하자가 아니라, 앞으로 살면서 만나게 될 남들에게 정색하지 않으려면 여백 시간 없이 앞뒤로 촉박하게 일정을 잡지 말자고 다짐하는 것이다. 세상의 경쟁과 속도가 유발하는 조급함에 끌려다니노라면 내 화에 내가 파묻히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내 삶에 내가 친절해지는 안전 장치를 구축하는 게 중요함을 알게 된다.

요즘 강연을 가면 ‘베스트셀러 작가님을 모셨다’고 소개받는다. 처음엔 정말 놀랐다. 내가 왜 언제부터 ‘베셀 작가’가 됐는지 낯설기만 하다. 또 작가님 알아보는 사람 많지 않느냐는 질문도 받는다. 거의 없다고 답한다. 앞서 말한 브런치 카페 직원 분이 있었고, 동네카페에서 인사를 건넨 분을 한 번 만난 게 전부다. 누가 나를 알아보고 아니고가 뭐 그다지 중요할까. 다만 내 얼굴이 아니라 내가 뿌려놓은 말들을 알아보고 기억하는 분들과 살아가기 위한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경각심이 든다.

내 삶의 목표가 ‘인간성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친절에 대해 쓰는 사람’이고는 싶다. 친절에 대해 거듭 말하고 쓰고 고민하는데 희안하게 자꾸 실패해서 반성하느라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걸 아는 사람, 그렇게 용 쓰다보니 주름이 늘 듯이 말투와 표정에 친절의 함량이 높아지면 좋겠다고 새해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