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서연(페미니스트 문화연구자)

 
‘군통령’. 10여 년 전부터 TV 예능이나 음악방송, 군 위문 공연 등을 통해 현역 장병들에게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여성 가수 및 걸그룹을 가리키는 데 주로 쓰여 온 표현이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특별히 인기 있는 여성 연예인이라는 존재는 기실 한국 군대의 역사와 함께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 배경과 조건의 차이에 대한 일반화를 감수하고 말하자면, ‘군통령’은 군사조직의 사기를 진작하려는 군 당국, 군 위문 퍼포먼스를 활용하여 연예인의 입지를 높이려는 엔터테인먼트 업계, 그리고 이를 콘텐츠화하여 수익을 창출하려는 미디어 업계의 결속과 이에 대한 군인들의 호응이 결합하여 탄생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브레이브걸스(Brave Girls) - 롤린(Rollin') 댓글 모음 영상 (유튜브 ‘비디터’ 채널 캡처: 영상 링크)

브레이브걸스(Brave Girls) – 롤린(Rollin’) 댓글 모음 영상 (유튜브 ‘비디터’ 채널 캡처: 영상 링크)

그런데 최근 명실상부한 ‘군통령’으로 꼽히는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는 그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양상을 보인다. 브레이브걸스가 ‘군통령’이 된 것은 기존과 같은 하향식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팬들의 밀어올리기에 힘입은 ‘역주행’의 방식을 통해서였다. 대중문화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의 성격을 지닌 능동적 소비자)로 부상하는 군인들이 주목받으면서, 브레이브걸스의 차트 역주행은 기획사가 뿌린 홍보자료 받아적기가 아닌 분석적인 보도의 대상으로 종종 다루어지기도 했다. 가령 링크한 기사의 주장처럼 한국 대중문화에서 군대가 과연 “풍자와 희화”의 대상이기만 했는지는 매우 의문이 들지만, 어쨌든 그와 같았던 군인들의 위치가 대중문화의 장에서 격상되고, 궁극적으로 “감동과 존중”의 대상이 되었다는 분석까지 나올 정도다.

무명 생활을 오래 겪은 걸그룹이 이들로부터 위안을 받았던 팬들의 자발적인 응원 덕분에 음원 차트 역주행에 성공했다는 애틋한 서사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만하다. ‘남성 군인의 위무를 위한 여성 섹슈얼리티의 동원’이라고만 비판하기에는, 이 그물을 벗어나는 지점도 적지 않다. ‘군통령’ 브레이브걸스를 둘러싼 현상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연예 산업과 군사주의의 결합에 대한 이해, 팬덤 활동에 대한 이해, 최근 이루어지는 군사-대중문화 콘텐츠 생산에 대한 이해 등이 함께 요청된다. 한 편의 글에서 이 문제들을 모두 다루기는 힘들겠지만, 당장의 질문을 몇 가지 나누는 것으로 글을 이어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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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위문 공연에 연예인들이 합류한 것은 한국전쟁 때부터의 일이며, 이것이 병영의 담장을 넘어서서 대중화된 것은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시기(1964~1973년)로 파악된다. 당대 최고의 연예인들이 총동원되어 베트남 현지의 장병이나 한국에 남은 파월 군인 가족들을 위로하는 공연 현장은 영상으로 기록‧편집되어 극장에서 상영되거나 TV로 송출되기도 했다. ‘월남전선’의 군인들이 그리운 고국에서 날아온 이들의 퍼포먼스에 울고 웃으며 마음을 달랬던 것은 물론, 국내의 일반 대중도 병영에서의 행사를 연예 콘텐츠로 즐기게 된 것이다. 이진아의 연구에서 논의되었듯, ‘동남아 순회공연’이라는 표현까지 유행시켰던 이러한 공연들은 ‘파월 한국군 남성-그 가족과 형제-이들을 위무하는 여성 연예인’이라는 가족적이고 성별화된 구도 속으로 박정희 군사정부의 국민을 호출하는 기제가 되었다(이진아, 「베트남전 위문공연에 대한 젠더론적 연구Ⅰ‧Ⅱ」).

파월 장병이 등장하는 명랑한 분위기의 문화영화 포스터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제공)

파월 장병이 등장하는 명랑한 분위기의 문화영화 포스터들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제공)

이처럼 직접적인 위문 공연 외에, 〈속 팔도강산 : 세계를 간다〉, 〈팔도유람 관광열차〉를 비롯한 일련의 문화영화1)들도 주요 사례로 꼽아볼 수 있다. 파월 장병 가족에게 주어지는 복지를 계기로 아버지나 노부부가 전국 및 세계 각지를 여행하는 내용의 이 영화들은,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을 정당화하고 전 국민의 군사화를 도모하며 경제 개발 드라이브에 박차를 가하는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대중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았다. 해외여행은 물론 전국 일주조차 쉽지 않았던 당시 대중에게 이러한 영화들은 세상을 구경하고 상상하는 통로였고, 각 행선지마다 등장하는 인기 가수들의 뮤직비디오 모음집이었으며, 스타 배우들의 콩트 연기를 한데 모아 볼 수 있는 눈요깃거리이기도 했다. 이처럼 명랑함이나 유쾌함 같은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느낌’과 가족주의를 밑바탕에 깐 애틋한 드라마를 군사정부의 발전주의와 적절히 섞은 콘텐츠들은, 연예인의 이미지와 퍼포먼스를 소비하고 싶어하는 대중적 욕구와 맞물려 강압적인 군대식 계몽이 아닌 ‘즐거운 군사화’를 가능하게 했다.

한편 이러한 위문 공연이 만들어 낸 예의 젠더화된 구도는, 어머니 상봉 코너 및 여성 가수의 퍼포먼스로 대표되는 1990년대 식 군대 위문 예능방송의 포맷에도 여성 성역할의 양극화된 형태로 반영되어 주말마다 각 가정의 TV 화면을 차지해 왔다. 대중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는 여성 가수들이 군대 위문 공연에서 특별히 각광 받는 존재임을 생각하면 문제가 좀 더 까다로워진다. 이는 연예 산업이 남성 군인들의 R&R2)에서 한몫을 담당하며 여성 연예인들을 활용하는,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오랜 관습을 이루어 온 바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군사 당국과 연예 산업의 합작은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군사주의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위무의 자원으로 동원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대 대중이 연예 콘텐츠를 향유하는 양상을 감싸고 돌면서 군사주의의 자연스러운 일상화를 이끌어낸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서로 분리되어 일어나지 않으며, 한 가지의 고정된 방식으로만 발생하지도 않는다. ‘군통령’ 브레이브걸스라는 현상이 제기하는 오래고도 새로운 논점들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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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일에 대한 질문부터 끌어와 보자. 한국전쟁 이후 미8군 쇼단 여성 가수의 공연 경험에 대한 김은경의 연구는, ‘위문’이라는 국가 동원의 맥락 속에서 군인 관객들이 이들의 섹슈얼리티를 소비하고 종종 성희롱을 일삼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연구는 동시에, 스타이자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진 이 가수들에게 있어 “과한 호응”은 관객과의 교감이자 현장성의 체험이기도 했다는 점, 이러한 노동이 가수로서의 “자아실현”이자 “유희”이기도 했다는 점도 함께 언급한다(김은경, 「유희로서의 노동, 노동으로서의 유희」). 이는 군 위문 공연의 여성 섹슈얼리티 착취에 대한 비판이 진실을 가리키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이 무대의 모든 것만은 아님을 시사한다.

이 논의를 참고하며 ‘군통령’ 브레이브걸스의 차트 역주행이라는 사례를 들여다볼 때 부각되는 지점은 스타와 팬덤 간의 관계다. 브레이브걸스를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했던 유튜브 영상의 수많은 댓글에는, 이들이 음원 차트의 순위권에 들지 못했어도 현역 군인들에게는 오랫동안 열렬히 사랑받아왔다는 증언이 가득하다. 이는 기수를 거듭하며 형성되어 온 군대 내 서브컬처의 존재를 보여주는 바이자 이 서브컬처가 병영 너머로 발신되었음을 알려주는 바다.

브레이브걸스의 주된 활동 무대이기도 했던 국방TV의 〈위문열차〉와 같은 공연은 민간 사회의 인기 연예인들이 일선 부대에 방문하는, 즉 사회의 대중문화가 군 부대를 향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가깝다. 육군본부의 ‘지상군 페스티벌’이나 〈신흥무관학교〉, 〈귀환〉 등 국방부 제작 뮤지컬과 같이 군대의 무대가 민간 사회의 팬덤을 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역시 군대 홍보를 위해 군 복무 중인 연예인들이 동원되는 형태라는 점에서 위문 공연이 지닌 하향식의 조직 원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러나 브레이브걸스의 음원 차트 역주행은 일선 군부대에서 형성된 서브컬처 내부의 열렬한 호응이 유튜브라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과 조응하여 군 당국이나 연예 기획사, 전통적 미디어(방송) 업계의 기획을 거치지 않고 사회로 발신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차이가 난다. 이는 ‘통장으로 키운 내 새끼’라는 관용구를 통해 단적으로 시사되는 아이돌 팬덤의 프로슈머적 속성이 위문 공연이라는 군사문화에서 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브레이브걸스의 사례에서 스타와 팬덤의 관계는 위문 공연에서 응당 상정되는 동원의 구도를 초과하는 상호 ‘보은’의 차원을 형성한다. JTBC 〈뉴스룸〉 인터뷰를 통해 브레이브걸스가 팬들에게 보낸 영상 메시지(JTBC 영상 링크)에 담긴 감사의 마음은, 가수 당사자들이 느끼는 전문 예술인으로서의 고양감과 이들의 성공을 응원하는 팬덤 사이에 형성된 결속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위문공연이 성차별적이라는 주장에) 장병들이 상처를 받는다”라며 섭섭함을 표현한 국방TV 관계자의 발언 또한(뉴시스 기사 링크), 더 따져볼 여지가 상당하기는 하지만 일단은 진심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상처를 받는다’라는 표현에서, 스타와 팬덤 간의 유대관계에 배어 있는 ‘진정성’이 지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이브걸스 〈롤린(Rollin')〉 음원 커버

브레이브걸스 〈롤린(Rollin’)〉 음원 커버

군 위문 공연에서부터 시작된 스타와 팬덤 간의 상호 소통은 병영의 좁은 담장을 넘어 사회로 확장되면서 아이돌 산업의 여성 섹슈얼리티 활용이라는 측면까지 건드린다. 위 사진은 브레이브걸스를 ‘군통령’으로 만든 히트곡 〈롤린(Rollin’)〉의 교체된 음원 커버 이미지이다. 기획사가 내놓은 기존 음원 커버의 섹스어필이 곡의 청량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데다 사용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진입장벽을 만든다는 것이 교체의 이유였다. 이 교체를 이끈 것이 팬덤의 요구였다는 것, 나아가 채택된 이미지가 익명의 팬이 기획사에 자발적으로 제공한 팬아트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군통령’이 되려면 으레 선정적인 섹슈얼리티를 남성 군인에게 제공해야 성공한다는 기존의 통념을 팬덤 측에서 거부하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노래는 좋은데 안무는 그에 걸맞지 않게 낡은 섹스어필을 추구한다는 점이 아쉽다는 토로가 팬덤 내에서 종종 나오는 것도 이러한 흐름 속의 일일 것이다.

‘우리가 원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브레이브걸스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이 강력한 주장. 이는 그간 축적되어 온 페미니즘 운동 덕분에 젠더 감수성이 향상된 최근의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가수 자신의 성별이 무엇이든, 아이돌이 일정 정도 이상의 성공을 거두려면 여성 팬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상식 또한 여기에서 떠올려볼 만하다.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을 이끈 음원 소비자의 성비 역시 여성 쪽이 높다는 점은 이를 새삼스럽게 방증한다. 관점에 따라서는 이러한 현상에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의식의 성장이 군대의 문화까지 바꾸는 ‘군사의 사회화’라든가, 전통적인 군인 남성성의 시효가 다했다는 징후라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표면적인 이미지의 선정성이 청량함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위문 공연의 모든 문제가 상쇄되는 것은 아니다. ‘위문 제공’이라는 하향식의 기획을 초과하는 팬덤 수행을 낙관적으로 해석하는 일각의 보도 태도 또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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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이 군인 관객들의 ‘보은’에 힘입어 시작된 만큼, 이들이 민간 사회에서 보편적인 인기를 얻게 된 후에도 ‘군통령’이라는 수식어는 의리의 차원에서든 전략의 차원에서든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유튜브 채널 ‘비디터’의 “브레이브걸스_롤린_댓글모음” 1편과 2편은 이들의 역주행을 이끈 결정적인 계기였다. 이 영상은 브레이브걸스의 퍼포먼스와 이들에게 열광을 보내는 군인 관중의 모습을 교차 편집하는 한편으로 그동안 관련 영상에 달린 여러 댓글을 편집자가 선택하여 화면 내에 삽입해 놓았는데, 이 댓글들은 무대에서 넘쳐나는 긍정적 에너지에 대한 감탄, 군 생활 동안 브레이브걸스가 주는 힘과 위로에 얼마나 의지했는지에 대한 고백, ‘밀보드(밀리터리 빌보드)’의 영향력에 대한 팬들의 뿌듯함과 더불어 위문 공연이라는 행사가 지닌 군사주의적 성격 또한 여과 없이 담아내고 있다. 마지막 항목과 관련된 댓글 중 영상에 삽입된 것들만 골라 인용해 보면 아래와 같다.

“전쟁때 이거 틀어주면 전쟁 이김” “인민군도 신나서 흔들어제낌ㄹㅇ” “대북방송으로 이거틀면 지뢰밭뚫고 달려온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통일되겠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투력 증진” “저 후렴에 맞춰서 단체로 팔돌리는 군인들을 보고 어떤 적군이 안 도망가겠냐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북방송으로 밤새 롤린 해줬어봐 역사가 바뀌었지” “X사단 XX군번 GP 출신인데 GP에서 대북방송으로 누가 신청곡으로 이거 신청했는지 아쉽게도 넘어오는애는 없었음 영상도 같이 했어야했나” “영상까지틀었으면 그날 철조망 무너졋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위문 공연은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사기를 진작하기 위한 것으로, 이는 결국 위 인용 중 한 댓글이 정확히 말해주듯이 전투력 증진을 위한 전략의 일환이다. 브레이브걸스와 팬덤 간의 애정 어린 결속감이 얼마나 감동적이든 간에, 이들의 공연이 군사조직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동원된다는 본질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이는 나아가 한국군의 적으로 상정되는 북한군에 대한 프로파간다에서의 여성 섹슈얼리티 동원이라는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이 글에 굳이 관련 이미지를 첨부하지는 않겠지만, 성매매 업소 광고지를 방불케 하는 젊은 여성들의 선정적이고 유혹적인 신체 이미지 사진을 넣고 ‘남한으로 귀순하면 이 여성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라는 의도의 노골적인 문구를 삽입했던 과거 대북 삐라들의 논리와 위에 인용된 ‘영상’을 운운하는 댓글들의 논리는 너무도 닮아있지 않은가.

한편 관련 유튜브 영상 아래에 달린 댓글 중에는, ‘이 정도면 브레이브걸스도 국방의 의무를 다한 것’이라는 식의 언사가 종종 눈에 띈다. 이는 여성 군 복무 의무화가 다시금 뜨거운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금의 시점에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사고방식이다. 이 대목에서 이들이 여성의 군 복무를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 것인지, 군사주의 내 여성의 자리가 어떻게 상정되고 있는 것인지 따져 물어야 한다. 이미 전문적인 군인으로서 성실히 복무하고 있는 여군들조차 종종 남군과 동등한 군인이 아닌 군대 내의 ‘꽃’이기를 요구받는다는 현실, 성적 존재로서 대상화되거나 성폭력의 피해자가 된다는 현실을 생각할 때, 여성 연예인이 남성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웠으니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는 농담은 그저 농담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밀보드’의 힘을 보여준 프로슈머적 팬덤에 대한 과도한 의미부여의 문제다. 1997년 MBC의 〈우정의 무대〉가 종영된 후 2000년대에도 지상파 방송국의 위문 공연 예능이 몇 차례 등장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 일반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러한 포맷의 프로그램은 국방TV와 같은 특수한 채널로 밀려나야 했다. 대신 201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군대 예능은 바로 MBC의 〈진짜 사나이〉 시리즈였다. 여러 연구에서 분석되었듯이 이 병영체험 예능은 ‘자기계발하는 군사화된 주체’를 흡인력 있는 서사에 실어 재현함으로써 당대의 시대정신과 조응했다. 말하자면 재현의 전략과 감각이 바뀌었을 뿐, 방송 예능을 통한 군사 프로파간다의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이와 같은 병영체험 예능이 군사 홍보를 원하는 군 당국의 의도와 결합하여 매주 일요일 저녁의 TV 채널을 차지하며 군사주의의 일상화를 도모했다면, 〈진짜 사나이〉를 패러디하여 군 출신 ‘민간인’들이 제작한 웹 예능으로서 2020년대의 초입을 강타했던 〈가짜 사나이〉는 어떠한가. 〈가짜 사나이〉가 전통적인 권력을 가진 거대한 시스템이 기획해서 만든 ‘가짜 이야기’가 아닌, 자생적인 유튜브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낸 생생한 콘텐츠라는 점은 꽤나 사실이다. 문제는 이것이 민간군사기업의 간접적 홍보라는, 전통적 미디어에서는 오히려 이루어질 수 없는 방식의 새로운 군사화를 도모한 사례라는 점이다.

자생적인, 자발적인, 아래로부터의, 이런 달콤한 말들이 그 자체로 새롭고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밀보드’에서 발신된 브레이브걸스의 역주행 역시, 아이돌 팬덤 수행과 뉴미디어의 시대에 발현되는 일선 현역 군인들의 자기효능감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있지만, 실은 연예 산업과 군사주의의 공모라는 오랜 돌림노래의 새 절이 추가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힘들다. 무언가 새로워 보이고 달라 보이지만 여전히 지속되는 오랜 억압의 논리들, 그대로인 듯하지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속성들을 지닌 새로운 군사화의 현상들 앞에서 우리는 이제 또 무엇을 어떻게 질문하고 따지고 실천해야 할까. 무명 아이돌 그룹이 드디어 빛을 보았다는 일견 흐뭇한 소식 앞에서, 반군사주의, 평화주의, 페미니즘을 고민하는 이들의 심경은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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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정확히 정의하기 어려운 범주지만, 상업영화와 대비되어 교육적‧시사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기록영화를 주로 가리킨다. 뉴스영화나 다큐멘터리는 물론 극영화나 애니메이션도 다수 포함되었으며, 국가 시책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2. Rest and Relaxation/Recuperate(휴식‧오락‧회복).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 전투병들의 극심한 스트레스를 관리하기 위해 실시된 위로 휴가에서 비롯한 용어이다. 세계 각지(특히 아시아)의 미군 부대 기지촌 문제를 논할 때 주로 호출되는 개념이지만, 군대 위문 공연이 운영되는 논리 또한 R&R의 논리와 일맥상통하며, 그 자체가 R&R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