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숙(만화평론가)

 

 

어떤 이들에게 <삼국지>는 일과 커리어의 방향성을 가늠하는 경전과도 같다. 특히 스타트업의 CEO나 경영 컨설턴트 등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병법을 예로 들며 경영 전략을 세우기도 한다. 군주와 그 책사들의 이야기인 <삼국지>가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CEO들의 필독서가 된 것만 보더라도, <삼국지>는 힘 있고 이름 있는 이들의 서사에 불과하다. 군사를 지휘하는 병법서는 말처럼 놓이는 개별 병사의 삶을 모르고, 알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거꾸로 그런 군주야말로 장기 말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그들을 말처럼 놓는 것이, 전쟁터에서 가장 취약한 줄만 알았던 여성이라면. 만화 <여자 제갈량>은 이러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삼국지>의 서사를 뒤집어 재현한다. 단지 책사들의 성별만 바꾸었을 뿐인데, 이야기의 초점과 전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컨대 순욱은 이렇게 말한다. “저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해야 할 국가란 없습니다”라고. 조조에게 충정을 다하던 원작의 <삼국지> 속 순욱에게 이런 대사가 어울릴 리 만무하다. <여자 제갈량>의 순욱이 이런 말을 하는 건, 그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책사들은 고통받는 여성들 가운데 간택된 극소수의 인재다. 사실 이들이 지내 왔던 대혼돈의 전쟁터 안에서 여자들은 곧잘 재물로 환원되거나 아기를 낳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여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길거리에 버려지거나 손쉽게 팔려나가기도 한다. 제갈량도 어린 시절, 오라버니의 등에 업혀 피난을 가다가 버려질 뻔했다.

이들은 주변의 여성들이 아무렇지 않게 죽임 당하는 광경을 너무나 오랫동안, 그리고 수도 없이 목도해 왔다. 바뀐 건 성별 하나이지만, 그 하나로 인해 삶에 축적된 경험이 총체적으로 달라진 셈이다. 그래서 여자인 순욱인, 조조에게 진심 어린 충정을 바치지 못한다. 그의 목표는 조조에게 제국 통일의 영예를 안기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한 전쟁과 살육을 멈추는 것이다.

물론 <여자 제갈량>의 모든 여성 책사가 평화를 바라는 건 아니다. 곽가는 오히려 더 거센 전쟁을 보고 싶어 한다. “이 알량한 문명이라는 걸 다 태워버릴 정도의 불꽃”을 위해 그는 조조의 야심을 부채질한다. 이 욕망의 뒤에는 군주들이 그런 것처럼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이 아니라, 끝없는 전쟁에 대한 뿌리 깊은 허무가 자리하고 있다. 무엇보다 <여자 제갈량>의 책사들은 전쟁에 깊이 관여하지만, 전쟁에 절대 취하지 않는다. 이들은 전쟁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소수의 야심으로 인한 끝없는 폭력, 가장 약한 사람들부터 취하고 죽이는 야만적인 사회. 전쟁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전쟁터 한 가운데에 있는 그 고독 때문일까. <여자 제갈량>의 캐릭터들은 모두 저마다의 허무와 애써 투쟁한다. 이들이야말로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전쟁 없는 세상’을.

감사하게도 2023년부터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전쟁 X 만화’를 주제로 글을 쓸 기회가 주어졌다. 전쟁과 관련한 국제 뉴스를 볼 땐 전쟁의 참혹함을 곧잘 느끼곤 했으나, 정기적으로 전쟁에 대해 사유하는 일은 없었다. 이번 연재를 계기로 다시 차근히 살펴보니 내가 지금까지 읽어 왔던 수많은 작품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전쟁터를 그려내고 있었다. 어떤 전쟁터는 성취의 무대였고, 또 어떤 곳은 로맨스가 이뤄지는 사랑의 공간이었다. 때로는 이곳에서 우정이 맺어지기도 하고, 새로운 기회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전쟁터에는 언제나 희생과 죽음,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어떤 목적을 위해 묘사되더라도 전쟁터에선 반드시 누군가 죽었다. 엑스트라든, 주요 캐릭터든, 적군이든, 아군이든 그 누구든. 그 모든 죽음이 외치는 듯했다. 어떤 전쟁이든 명분은 있지만, 우리에겐 이 전쟁이 필요한 진짜 이유가 없다고. 앞으로는 그 어떤 만화를 보더라도 이 목소리들을 더 귀 기울여 듣게 될 것 같다.

 

《여자제갈량》1권 표지. 출처: 표지와 메인 이미지 모두 레진코민스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았습니다

《여자제갈량》1권 표지. 출처: 표지와 메인 이미지 모두 레진코민스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았습니다

 

[전쟁+만화] 연재에서 소개했던 만화

<진홍의 카르마> 쌀숲・야샌・라다(원작 레몬개구리), 카카오페이지
<민간인 통제구역> OSIK, 네이버웹툰 (웹툰) / 고트 GOAT (출판)
<플루토> 데즈카 오사무・우라사와 나오키 저, 윤영의 역, 서울미디어코믹스
<물 위의 우리> 뱁새・왈패, 네이버웹툰
<황금동 사람들> 박건웅, 카카오페이지 (웹툰) / 우리나비 (출판)
<여자 제갈량> 김달, 레진코믹스